창업 열풍이 다시 불어온다. 초기 창업기업을 뜻하는 ‘스타트업’은 신기술과 일자리를 창출해 낸다는 측면에서 향후 경제를 이끌어갈 유망주로 손꼽힌다. 민·관 모두 차기 산업을 이끄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를 찾기 위해 분주한 이유다.
해외에서도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등 유망기술을 중심으로 스타트업 판이 커지고 있다. 앞서 구글, 아마존, 우버, 테슬라 등 내로라하는 해외 기업들은 모두 스타트업에서 출발했다. 이 기업들이 또 다시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피며 차기 ‘구글’을 찾는 중이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가진 스타트업 생태계 평가액은 2640억 달러(약 301조원)로, 약 1만 2000개 이상 스타트업들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하지만 단기간 성장을 이뤘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법인회사는 9만6000개였다. 5년 전보다 3만 개 이상 급증한 것이다. 지난해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2조1503억원으로, 총 1191개 기업에 투자를 했다. 신규 벤처펀드 조성금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국내 스타트업이 진출한 분야도 다양하다. 핀테크(Fintech), 헬스케어, 이커머스, 콘텐츠, SNS, 게임 등 스타트업이 진출할 수 있는 시장은 아주 넓다. 사업 영역으로 분류한다면 소셜벤처, 인공지능(AI), 하드웨어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O2O(Online to Offline, 온·오프라인 연계서비스) 스타트업들도 2년 전부터 급격하게 성장하는 추세다. 특히 O2O와 이커머스 분야는 2~3년 새 창업가들이 몰려드는 분야다.
그러나 여기서 ‘유망주’ 이름표를 떼고 유니콘 기업이 된 스타트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니콘은 우리가 아는 신화 속 동물이 아닌, 기업가치 1조원 이상으로 성장한 기업을 의미한다. 네이버나 카카오, 옐로모바일 등이 대표적인 유니콘 정보통신기술(ICT) 스타트업이다. 아직 그 뒤를 잇는 스타트업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태다.
이기대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이사는 “잠재성을 인정받아 시드투자를 유치했던 스타트업도 3~4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며 “다크호스라고 불리는 스타트업들은 추입마다. 추입마는 먼저 달리는 선행마를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달리는 말이다. 추입마는 받쳐주는 힘이 없으면 안 된다. 스타트업도 잘 개발했다가 후반 단계에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이 성장하지 못하면 당연히 글로벌 경쟁력 저하도 불가피해진다. 해외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해외 투자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최근 1년간 투자받은 스타트업 중 누적 투자액 상위 100개 업체를 살펴봐도 한국은 전무하다. 좋은 기술이 있더라도 대규모 해외 투자를 받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많은 게 현실이다.
올해 3월 미국 스타트업 연구기관 ‘스타트업 게놈 프로젝트’가 발표한 ‘2017 스타트업 생태계 랭킹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인도·중국의 4개 도시가 순위권에 들었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는 스타트업 성과와 투자금 모금 용이성, 투자자 경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1~3위는 미국 실리콘밸리, 뉴욕, 영국 런던이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상위 20위권에 포함되지 않았다.
보고서는 대한민국 서울 스타트업 생태계 약점으로 시장 도달을 꼽았다. 글로벌 시장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낮다는 의미다. 외국 고객의 비율도 14%로 글로벌 평균 23%보다 훨씬 낮았다. 아시아 지역 외 다른 해외 지역 고객 비율은 8%에 그쳤다. 해외 스타트업 시장과 연결되는 글로벌 연결성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국내 스타트업 대부분이 내수 시장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이 만나는 죽음의 계곡도 문제다. 일명 데스밸리(Death Balley)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창업 3~7년 차 제품 상용화 단계에서 수익을 내지 못해 도태되는 것을 뜻한다. 이 단계를 넘지 못하면 스타트업은 더는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속된 말로 ‘망하게’ 된다. 데스밸리에 부딪힌 스타트업들은 주식상장이나 대기업 인수합병(M&A)같은 투자금회수(IPO) 단계까지 갈 수 조차 없다. 데스밸리를 건너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급증한다는 건 생태계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데스밸리가 마냥 나쁜 현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에 따라 움직인다. 스타트업이 만든 서비스나 상품이 외면당한다면 그 흐름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계에 ‘탄생’과 ‘죽음’이 존재하듯, 데스밸리를 거치면서 걸러진 스타트업 생태계가 더 건강해진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영덕 롯데액셀러레이터 상무는 “데스밸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좋지 않은 현상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 오히려 데스밸리를 맞이해 사장돼야 할 기업이 살아나도록 지원하는 게 유니콘 스타트업을 막는 길”이라며 “시장성과 전망성이 없는 기업에 불필요한 투자나 지원이 흘러간다면 그만큼 커야 하는 기업들에게 돌아가는 지원이 더 적어진다. 무작정 데스밸리를 넘기기 위해 정부나 민간협회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늘 동전의 양면을 봐야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김 상무는 이어 “우리나라 창업생태계가 원활하지 않으니 무작정 보완해 주자는 것은 잘못된 접근방식”이라며 “물론 데스밸리를 극복하는 걸 도와줘야 할 만큼, 가치있는 5% 기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스타트업들을 냉정하고 예리하게 선정하는 기준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유니콘 스타트업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데스밸리 극복을 위한 지원이 아닌 실질적인 창업 교육 및 인력 유치가 중요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창업 현장에서 일했던 전문가들이 단계별로 후배 스타트업을 교육하고 전문적인 멘토링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역량있는 인재 유입 시스템이 원활하게 구축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 상무는 “창업자들은 위기를 맞을 때 해결할 수 있는 경험이나 안목이 부족하다. 데스밸리를 겪더라도 성장 모멘텀을 만들 때 해결할 수 있는 인재 풀(Pool)이 마련돼야 한다. 인재들이 내리막길을 걷는 기업에 고여있지 않고 움직여주는 것도 일종의 조직 선순환”이라며 “또 전문 멘토링을 통해 경영 노하우를 전달받는다면 스타트업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교육과 인재야말로 고비를 넘기고 유니콘 스타트업을 성장하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스타트업들이 자체적으로 넓은 시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와 다르게 국내 스타트업들은 한정된 시장에만 집중하고 있다. 유니콘 스타트업으로 크기 위해선 시장을 넓게 보고, 전략적 제휴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 지원’에만 집중해선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정재호 카이스트 청년창업투자지주 이사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어느 정도 조성돼 있다. 시장, 정부 지원보다는 스타트업들이 큰 시장을 지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는 사업 타깃이나 사업 아이템들이 너무 한정적이다.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하는 사업들은 무척 넓은 시장을 타깃으로 한다”고 밝혔다.
정 이사는 또 “큰 시장에 적합한 스타트업이 되기 위해선 연합, 즉 전략적 제휴가 중요하다. 실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기업이나 전문기관, 스타트업끼리 약한 부분을 보완하고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며 “일단 스타트업 자체 강점을 파악하고 그 리소스를 잘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스타트업 현직 창업자들도 ‘묻지마 지원’ 정책을 바라지 않는다. 스타트업 산업이 정치적 이익에 사용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정부와 대기업, 투자자들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O2O, 핀테크, 헬스케어 등 주요 산업들이 정부 규제를 넘지 못해 사업 방향을 우회하는 추세다. 한 주류 배송 스타트업은 창업가들은 모든 규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필요한 규제는 남겨놓더라도, 사업을 뒷받침해줄 현실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직 창업 3년차인 심상민 호갱노노 대표는 “사업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법과 규제에 마주치게 된다. 부동산 같은 경우에도 임대법, 공인중개사법이 다 모여 있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힘들지만 물론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며 “다만 스타트업 업계의 이야기를 잘 듣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여행 공유경제 플랫폼을 제공해온 이동건 마이리얼트립 대표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스타트업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정부부처가 나서는 편이다. 공청회를 여는 등 소통 기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